top of page

"그 날 고백하려고!"

 

눈 앞의 세로에게 카미나리는 그렇게 말했다.

 

"... 그 사람한테?"

"응! 꽃도 사들고 갈 거야. 물론 걔가 꽃을 좋아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꽃 싫어하는 사람은 웬만해선 없지 않겠냐."

"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세로는 피식 웃었다.

결코 기분이 좋아 웃은 것은 아니었다.

 

"좋아한 지 꽤 됐다면, 우리 반?"

"아, 그걸 먼저 알려고 하면 안 되지~ 그때가 되면, 싫어도 알게 될 거야!"

"그래... 꼭 성공했으면 좋겠네."

"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쩐지 뭐가 됐든 간에 성공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을 잘 맞받아쳐주는 세로에 신이 났는지 카미나리는 잔뜩 고조된 텐션으로 말을 늘어놓는다.

 

"최대한 멋지게 하고 만나고 싶은데! 아, 머리도 하는 게 좋을까?"

"데뷔 날이라며? 시간 없지 않을까?"

"음... 그럼 정장이라도 맞춰봐야 하나?"

"되게 긴장했구나, 너... 그냥 예쁜 사복이면 되지 않을까."

"반지는-"

"진정하라니까. 그냥 좋아한다는 한 마디면 돼."

 

세로가 손등으로 톡, 가볍게 카미나리 앞의 탁자를 두드렸다. 한껏 들뜬 얼굴로 말을 쏟아내던 카미나리가 눈을 깜빡이다 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렇다고."

"그래 그래."

 

 

부르르, 떨리는 핸드폰을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집어 드는 카미나리에게 세로는 다시 작게 웃어 보였다.

 

 

 

 

'그 날 고백하려고!'

 

카미나리는 떠났다. 오랜만의 느긋한 만남이었는데, 급하게 호출을 받고서 제 앞에 놓인 케이크마저 반 이상 남겨놓고 떠나는 카미나리를 세로는 막아설 수 없었다. 설령 반대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자신 또한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기에. 다음에 오늘을 꼭 벌충하겠다며 미안함으로 눈썹을 내려까는 카미나리 앞에서 세로는 신경 쓰지 말라며 웃었다. 그래, 일이니까. 일이니까 이 정도는 상관없어. 나중에 벌충할 기회가 생기든, 결국은 또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던. 그건 솔직히 어찌 되든 좋아. 그렇지만-

아까 한 그 말은 말이야.

 

"초조해져서 어쩌게... 그렇다고 먼저 고백해버릴 배짱도 없으면서."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머지않아 마침내 고백할 거라는 그 말은 말이야.

 

'꼭 성공했으면 좋겠네.'

 

그 말은 곧 너의 마음에 나는 없었고 없을 거라는 의미가 되니까.

 

"그럼 난 그 날 술이나 깔 준비라도 하고 있으면 되나..."

 

그리고 곧 너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이니까.

 

'세로!'

 

너를 소유할 생각도, 그럴 재간도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말이야, 카미나리. 괜히 아쉬워져.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아니, 물론 네게 있어 나는 소중한 친구겠지만, 그 선을 넘어서는 아무 의미도 아닐 텐데. 내가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잘것 없는 이런 생각들이 자꾸 들어. 내가, 뭔가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바뀌지 않기로 결정한 건 나인데.

 

 

고마워 세로 다 네 덕분이야

 

 

네가, 비로소 행복해진 네가 내 앞에 그 누군가의 손을 잡고 와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웃어줄 수 있어야 할 텐데.

 

 

 

*

 

 

 

"근데 왜 꼭 데뷔하는 그 날이야?"

 

모처럼 짬이 나 카미나리의 광고 촬영장에 온 지로가 거울 앞에서 제 옷 태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카미나리에게 물었다. 셔츠의 주름은 탈탈 털어서 펴던 카미나리가 음- 길게 말꼬리를 끌었다.

 

"왜 있잖아~ 너희들은 이미 다 데뷔한 지 오래니까."

"그래 봤자 아직 일이 년 정도잖아."

"그래도 내가 제일 늦은 걸."

"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그 말에 지로가 카미나리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그래, 그 말대로 카미나리의 늦은 행보에는 확실히 어쩔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유에이를 졸업한 직후, 사이드킥으로 갓 들어간 사무소에서 카미나리는 채 3달이 지나기도 전에 빌런을 제압하다 심각한 중상을 입어 오랫동안 의식 불명인 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한 때는 뇌사에 대한 말도 오고 갔을 정도로 심각한 중태였다. 카미나리의 병실에 찾아온 친구들이 우는 일도 더러 있었다. 적어도 입원해 있던 일 년 동안은, 카미나리는 도저히 깨어날 가망이 보이지 않는 반쪽짜리 목숨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주변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친구들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다 제 얼굴에 덮어 쓰인 산소호흡기를 흘끗거리더니 카미나리는 이내 한 손으로 그것을 얼굴로부터 떼어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쓰질 않아 푹 짓눌려버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 나 많이 잤어?'

 

카미나리가 무사히 퇴원해 지금의 위치로 올라오기까지는 꼬박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무튼... 지금은 아직 반 인분이라는 느낌이 드니까 뭔가 안 돼."

"반 인분이라니..."

"그리고 데뷔하는 날이라고 해도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다고! 악! 일주일밖에 안 남은 거야? 어쩌지?"

"내가 아냐..."

"아, 조언 좀 해줘~"

"나도 해본 적 없거든."

 

친구들의 걱정도 많이 샀던 그였다. 기약 없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복귀하겠다고 큰 소리 떵떵 치며 뛰쳐나간 카미나리 때문에 친구들이 사색이 되어 그를 말리러 달려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퇴원한 후에도 그 어떤 휴식기도 가지지 않고 바로 현장에 뛰어든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고 그를 타이르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카미나리는 웃으며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아니, 늦었어!'

 

그리고 카미나리의 시간은 오늘에 이르렀다.

 

 

"그쪽에서 받아줄 거라는 자신은 있어?"

"... 아니."

 

지로의 물음에 카미나리는 조금 뜸을 들이다 답을 했다. 그 대답에 지로는 다시 묻는다.

 

"그래도 하는 거야?"

"그 녀석은 나랑 평생 친구로 지내고 싶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

"겁은, 안 나?"

"나지. 내 마음을 전하고 나면 그 애랑 어색해져 버릴까 무섭기도 하고. 걔는... 그런 걸로 날 떠날 것 같진 않지만."

 

카미나리와 지로의 눈이 마주쳤다. 중얼거리듯 지로의 질문에 답변을 늘어놓던 카미나리는 제 친구의 눈빛을 읽어냈다. 그런데도 용기를 내는구나, 네가. 제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 어지간히도 내가 그 애에게 빠져 있구나. 카미나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웃는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기 위해.

무섭지만, 그래도 용기 내보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그때, 긴 잠에서 깨어나 그 애와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그 얼굴과 눈동자가 내게 말해주었으니까.

 

"걔는 의외로 겁이 많으니까."

 

네가 그곳에 있어주어서, 내게는 찰나처럼 짧았지만 네게는 길었던 그 시간을 건너뛰어 그곳에 네가 있었던 게 너무나 기뻤기에.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의 네 마음도 내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가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를 쫓아가 돌려 세우는 건 충분히 괜찮고 멋있는 나이고 싶었어.

 

 

 

*

 

 

 

[어울려?]

 

그 한 마디와 함께 날아온 한 통의 사진 속에는 정장을 멋지게 빼 입은 카미나리가 브이자를 하고 저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세로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서 그 사진을 응시한다. 그렇게 물어보더니 기어코 옷까지 샀구나. 그 와중에 옷이 또 카미나리와 썩 잘 어울렸던지라 세로는 화면 속을 한참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세로가 톡, 톡, 자판창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잘생겼네]

[그래??]

[이 정도면 걱정할 것도 없지 않나]

[?]

[새삼 다시 반하게 하는 거 아냐? 그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라고 말하니 어감이 조금 이상하다. 아마도 내가 아는 사람, 그 중에서도 동기들일 텐데. 그렇지만 이 녀석이 알려주질 않으니 별 수 없다. 세로는 스크롤을 올려 그가 보낸 사진을 한 번 더 바라본다. 사진 위의 상태창에 메신저 표시가 떠올랐다.

 

[아냐~ 이거 광고 의상!]

 

아, 어쩐지.

긴장한 기색도 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그제야 사라졌다. 혼자 지레짐작으로 괜히 쓸데없는 감상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하니 보는 사람도 없는 데도 괜스레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이 쑥스러워 세로는 어색하게 한 글자, 반응을 한다.

 

[아]

[이것 참 쑥쓰럽게]

 

그래, 당일도 며칠 안 남은 마당에 이래저래 바쁠 텐데. 그런데 데뷔가 코 앞인 마당에 광고도 찍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홍보용으로 데뷔 당일이 방송 첫 시작일인 걸 한 편 찍는다고 했던 것도 같다.

그런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띠링, 새 메세지가 왔다.

 

[역시 차려 입고 가는 게 좋으려나? 정장 같은 거]

 

아, 방금 전 제 반응이 다시 그의 불안을 자극시켰나 보다.

세로는 일부러 조금 더 가벼운 어조로 그의 메시지에 답을 했다.

 

[고백?]

[ㅇㅇ]

[그건 결혼 전에 하시구요]

[ㄱ결혼 기분 되게 이상하다]

[할 수도 있지 왜]

[그야 할 수만 있으면 당연히 하고 싶지만.... 너무 성급한 것 같아서 부끄럽다고!]

 

아, 오버해서 수습하는 게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말은 내뱉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진심인 대답이 돌아오면-

 

[아무튼 내일 긴장 풀어. 데뷔도, 다른 것도]

[TV로 볼 거야?]

[그야 시간 되면 당연히]

[봐라 꼭 봐라! 인증샷 남겨!]

[그래그래]

 

세로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을 하면서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걸 어쩌냐, 카미나리. 아무래도 이 지경까지 와서도 내가 적잖은 타격을 받는 걸 보면 아직도 체념을 못한 모양인데.

 

[내가 그 날 실패해서 울면서 찾아가도 매몰차게 내쫓아버리면 안 돼!]

[그러겠냐;;]

 

너의 실패가 곧 나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냐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말이 씨가 된다고]

[그래 그 말이 맞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 뜨지 못하는 네 앞에서 내가 신에게 빈 소원을 기억한다.

 

 

하느님, 만일 카미나리가 깨어난다면, 그렇다면, 그렇기만 해준다면- 저는 평생 이 녀석 하나의 행복만을 빌게요. 끼어들 생각도, 훼방 놓을 생각도 없이 그냥/그저 평생 도움만 주는 그런 존재로 있을 테니, 제발. 제발.

제 친구를 돌려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너를 만나 울고 또 울면서 내가 빌었던 그 소원을 곱씹었는데. 내 행복이 아닌 오직, 너의 행복만 빌겠다고. 이 마음/감정보다 훨씬 소중한 네 행복을 빌겠다고, 그런 순수한 다짐을 몇 번이고 되짚고 되짚으며 다짐했는데. 그런데도 지금 나는 이렇게 가져서는 안 될 희망을 은근슬쩍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진짜 내일 나한테 울면서 찾아오면 어쩌려고]

 

 

내가 너에게 정말,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

 

 

 

샤워를 마치고 침대 위로 등부터 떨어지듯 벌렁 드러누운 카미나리는 배개 맡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오른팔을 위로 뻗어 더듬더듬 휴대폰을 손에 쥐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아, 역시? 카미나리는 수신 버튼을 당기면서도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건 세로뿐일 거라고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긴장 안 돼?]

"내일?"

[응.]

"괜찮아, 괜찮아. 잘 하겠지~"

 

카미나리는 보이지도 않는 세로를 안심시키는 것처럼 휙휙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확실히 그 자신에게는 긴장되는 일이긴 했으나, 딱히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킬 만한 일은 아니었다. 긴장을 하다 못해 주변 사람들 하나 둘에게 말하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지만- 그건 어쨌건 제 어쩔 수 없는 성격 탓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세로만큼은, 걱정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괜찮겠어?]

"아이, 그렇대두요~"

[아니, 그거 말고.]

"어?"

[고백.]

 

고백, 그 두 단어가 세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고백. 그래, 내일이지.

내일이야, 세로.

 

"사실 그것 때문에 나머지 것들이 의외로 다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네."

 

내일, 드디어 내일, 몇 년이고 넘지 못했던 선을 넘는 것이다. 겁이 나고 그 후의 일이 두려워 차마 내딛지 못했던 발이 마침내 그 아찔한 선 위를 밟는 날.

내일이면, 많은 것이 변한다.

 

[떨려?]

"그야 뭐..."

[준비는 잘 했고?"

"음,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자신은 없을지도.]

[왜?]

"걔는 나랑 그냥 친구로 있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몇 년동안 무서웠던 것이 하루아침에 괜찮아질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망설이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분명 용기를 냈지만, 여전히 바로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겁이 자꾸만 그 용기의 발을 끌었다.

 

"고백해서 거절 당하면 앞으로 어색해지면 어쩌나 싶고."

 

그리고 자꾸만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도 할 거잖아?"

"... 뭐, 그렇지."

"결심하게 된 계기라도 있는 거야?"

"음..."

 

카미나리는 세로의 질문에 긍정했다. 좋아했던 기간은 확실히 길었지만, 의외로 제대로 된 계기는 있었다. 아니, 제대로 됐다고는 보기 어려우려나.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 별것 아니니까.

 

"별 건 아닌데..."

 

그래, 정말 별것 아냐.

 

"손."

 

어느날 내 옆에서 졸고 있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잠에 취해 축 늘어진 그 손이 내 손에 살짝 닿아 있다는 걸 눈치챈 거야.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했는데도 손이 닿은 건 처음이었어. 따뜻하더라. 당연하지만, 따뜻했어. 그 체온이 느껴지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손을 잡고 싶어졌어."

 

사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잡아보고 싶었어. 잠에서 깨어날 일도 없을 정도로 아주 살짝, 몰래 잡아보려고 했지. 그렇지만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하다 결국 관뒀어.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그 감촉이 잠든 눈을 떠버리게 한다면, 내가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고백하려고."

 

그래서 그때 생각했어. 아,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이고 싶다. 지금처럼 졸음에 겨워 단잠에 빠진 그 손을 슬며시 잡았다가 행여나 깨워버린다고 하더라도, 웃으면서 그저 '잡고 싶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관계.

그 때 내가 너에게 가장 특별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카미나리."

 

전화기 너머로 세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라앉았지만 상냥한, 작게나마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였다.

 

"잘 해 봐."

 

친구의 그 목소리가 카미나리를 응원했다.

 

"그래."

 

그는 대답했다.

 

"화이팅."

 

 

내일 봐,

세로.

 

 

 

*

 

 

 

말 그대로 화려한 데뷔식이었다. 미디어에서 그 특유의 화려한 외견과 개성을 한껏 내비치며 개시의 신호탄을 올린 카미나리는 마침 타이밍 좋게 거리에서 날뛰어 댄 빌런들을 멋지게 제압하고서 시민들의 박수를 한 몸에 받으며 당당히 히어로 챠지즈마가 세상에 등장했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객관적으로, 카미나리 자신에게도, 성공적인 데뷔식이었을 것이다. 빌런을 제압하고 돌아가는 길, 세로는 저녁 거리의 전광판에서 먼지로 조금 더러워진 얼굴을 하고서 씩 웃고 있는 카미나리의 클로즈업 뉴스 화면과 마주쳤다.

 

'라이브가 아닌 게 다행이네. 저래선 멀끔하게 하고 가는데 꽤나 시간 잡아먹을 텐데.'

 

발걸음을 떼려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 속의 카미나리를 빤히 응시했다. 밝게 웃는 히어로 챠지즈마의 얼굴이 빛나는 전광판 위에 선명히 떠 있다. 그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며 세로는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 빛나는 미소는 과연, 오늘이 끝날 때까지 네 얼굴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언제 한번 네게 물은 적이 있었지.

 

'넌 어떤 사람이 좋아?'

'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너는 고개를 갸웃대며 한참 고민을 하더니 대답을 했다.

 

'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의지?"

'내 쪽에서 의지가 돼 주는 건 아무래도 제 성격상 조~금 어려울 것 같거든요~"

'그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그럼 나로도 괜찮잖아. 나는 딱히 너한테 어리광 부리지도 않고, 오히려 네 어리광을 받아주는 쪽이고. 억지 부리는 타입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착하는 타입도 아냐. 아니, 물론 속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걸 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일단 없을 테니까.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넌 그런 사람과 함께하면 편할 것 같은데, 카미나리. 그럼 나로도 괜찮지 않을까.

네가 알면 놀라겠지만, 카미나리. 너와 말을 주고받는 동안 내 머릿속엔 그냥, 그런 하찮은 생각들만 맴돌았어.

 

'너는 좋아하는 타입 있어? 아, 딱히 이상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있어.'

'뭔데?'

'좀 푼수 같은 사람.'

'뭔 이상형이 그래...?'

'내 맘이야.'

 

속 없는 것 같이 굴어도 나름대로 끙끙대며 고민하는 면이 있고,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지만 의외로 주변을 잘 보고 있는, 그게 너야. 그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엄청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아마 우리 반 애들 중 한 명일 테니, 그 애들 중에 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그래, 모두 다 좋은 녀석들이니까. 그중에서 네가 말하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카미나리. 나는 그저 궁금한 거야. 그 많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친구로서 정답게 지내온 그 가운데에서 너를 그렇게까지 웃고, 긴장하게 만든 녀석은 대체 누구인지.

 

'하여튼, 별나기는.'

 

과연 내가 사랑하는 너의 마음을 빼앗아 간 사람은 누구일까.

 

 

'제발'

 

아니, 아니야.

 

'제발요, 하느님.'

 

아니야.

 

'제발 제 친구를 제게 돌려주세요.'

 

오늘이 너의 최고의 하루로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 오늘의 너는 그저 행복하기만 할 거야. 니가 그 끔찍하고도 지긋지긋한 흰 침대에서 눈을 뜨고 그 금빛 눈동자를 내게 보여주는 순간 나는 이미 내 모든 소망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그 날부터 오늘까지 이어져 온 내 모든 감정은 그냥 전부 욕심일 뿐인 거다. 내 사랑을 받아주는 건 네 행복이 아닌, 내 행복이니까.

 

 

걷고 걸어 창문의 네모난 빛들만 찬란하게 눈에 들어오는 아파트 앞에 도착한 세로는 하, 희뿌연 입김을 짧게 내뱉었다. 이 어두운 밤길을 너는 달리고 있겠구나. 용기를 내어, 그 사람에게 네 마음을 전하기 위해.

 

"힘내, 카미나리."

 

그곳에서 세로는 그 불빛들을 바라보며 마침내 조용히 중얼거린다.

 

 

 

"네가 시끄럽게 웃으면서 전화하는 거 기다리고 있을게."

 

 

 

 

 

띵동

 

 

"...? 누구지?"

 

집에 도착한 세로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에서 나오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택배는 안 시켰던 것 같은데, 의아함을 느끼며 세로는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하얀 전등 빛이 드리운 복도 뿐이었다. 장난인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즈음 초인종이 다시 한번 울렸다.

 

띵동

 

"...네, 나가요~"

 

집에서 뭔가 보낸 건가? 그렇지만 그런 연락은 없었던 것 같은데-

 

현관으로 서둘러 걸어나가며 세로는 이 시각에 제 집에 찾아올 사람의 신원에 대해 여러 가지로 유추해 보았다. 그렇지만 역시 짐작가는 곳은 딱히 없다. 진짜 누구지?

세로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누구세-"

 

"... 오늘 봤어?"

 

 

그리고 거기엔 상상도 못 한 사람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서 있었다.

 

 

"카미나리?"

 

 

세로는 눈을 깜빡이며 제 눈 앞의 카미나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숨도 가쁠 뿐만 아니라 얼굴도 새빨갛다. 필시 이 추운 날씨에 먼 거리를 뛰어왔을 것이다. 머리도 제법 흐트러져 있다. 옷도 히어로 코스튬이 아니다. 그렇다면 집까지 갔다가 다시 갈아입고 나왔다는 말인데, 오늘 그렇게 제 집에 찾아올 만한 시간이 대체 어디 있다고-

부스럭, 카미나리의 등 뒤에 어렴풋이 붉은 장미의 다발이 보였다.  

 

"너-"

"아... 벌써 봤어...?"

 

카미나리의 눈동자가 뻣뻣하게 이리저리 서성였다. 가만히 서 있는 세로를 앞에 두고 우물쭈물거리던 그가 이윽고 으아아, 괴상한 기합소리를 흘리며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새빨간 장미꽃들이 노란색 리본으로 예쁘게 묶인 꽃다발. 입만 달싹이길 벌써 수십 번이던 카미나리가 마침내 입을 연다.

 

"하, 하,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

"사실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거든! 근데 좀처럼 타이밍을 못 잡아서 그래서! 지금 와서 말하는 것도 뭣한데 그렇다고 말 안 하고 넘어가기도 뭣하더라! 그래서 온 건데 있잖아! 이게 무슨 뜻이냐면!"

"... 카미나리."

"으, 이렇게 횡설수설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카미나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음 비슷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세로의 팔이 어정쩡하게 카미나리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이 카미나리의 어깨에 닿자마자 화들짝 놀란 카미나리가 튀어 오르듯 몸을 떨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속사포 같이 말을 쏟아냈다.

 

"이, 이거 장미 스무 송이거든! 스무 송이는 열렬히 사랑한다는 의미로 내가 널 예전부터 많이 좋아했다고 고백하고 싶었던 건데, 물론 이건 내 마음이니까 절대, 절대 강요하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많이 좋아한다고, 그래서 빨간 장미 사온 거고!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눈꺼풀이 빠르게 움직였다. 목울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두 귀가 볼만큼이나 새빨개져 있었다.

 

 

 

"좋아한다고!"

 

 

 

약 10년의 사랑을 품어온 그가 약 10년의 사랑을 숨겨온 그에게 붉은 장미 스무 송이와 함께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Unknown Track - Unknown Artist
00:00 / 00:00
bottom of page